동네 변호사 조들호에게 새로운 의뢰인이 찾아왔다. 바로 대전광역시 유성구 어은동에서 “닭터치킨”을 운영하는 이기훈(32)씨.
이기훈씨는 KAIST 학부 출신으로, 재학 기간 동안 뛰어난 성적으로 이공계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나 연구원의 길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학부시절 습득한 이공계적 지식을 바탕으로 치킨집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이기훈씨는 KAIST에서 습득한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적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 요리법을 개발하였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이씨가 치킨집을 차린 이래로 KAIST 학생들의 행복지수가 상승하였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승승장구하던 이씨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바로 국가에서 “이공계 장학금을 받았으나 이공계 진로로 가지 않았으므로 받은 장학금을 모두 환수하라.”는 요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4년 간 받았던 장학금을 단지 치킨집을 차렸다는 이유로 갑자기 내놓으라 하자 당황한 이씨는 이에 변호사 조들호를 찾아가 이것이 법적으로 타당한지 묻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건의 전말
‘이공계 장학금 환수정책’이 화두가 된 것은 지난해 10월 22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가 KAIST 국정감사를 실시하면서였다.
지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KAIST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이나 치의학전문대학원(치전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등 이공계가 아닌 진로를 택하는 건수가 매년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새누리당 권은희 의원은 "지난해 회계 기준으로 KAIST 학사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졸업 때까지 투자된 1인당 학비가 6천410만원이나 된다. 이렇게 이공계가 아닌 쪽으로 진로를 바꾸는 것은 국가 차원의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의·치전원이나 로스쿨과 같은 비이공계 분야로 진학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급증하자 이러한 학생들은 장학금을 환수해야 한다는 ‘이공계 장학금 환수정책’이 고개를 들었다.
의·치전원은 2002년부터 실시된 제도로, 학부 4년간 혹은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사람들이 의학 또는 치의학에 자신의 전공을 접목시켜 다양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오늘날 융합학문을 장려하는 분위기에 맞춰, 의학과 치의학 분야에서도 다른 학문과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로스쿨은 2009년도부터 도입되었는데, 법학 이외의 학문을 전공으로 이수한 학부졸업생을 대상으로 실무 위주의 법률 교육을 시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의·치전원과 로스쿨 제도의 도입으로 KAIST를 졸업하고 의학계열이나 사법계열로 종사할 수 있는 공식적인 루트가 생기자, 이공계 우수 인력들이 대거 진출하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 KAIST 학부 졸업생 2700명 중 의전원 346명(12.8%), 치전원 67명(2.5%), 로스쿨 41명(1.5%)이 진학한 것으로 밝혀졌다.
KAIST 졸업생들의 이러한 의학·법학계열 진학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냉담했다. 국정감사에서 무소속 강동원 의원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 학생을 비판할 수는 없으나, KAIST에서 이공계 비전은 바로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박대출 의원 또한 “KAIST 인재 유출 문제는 매년 국정감사에서 지적되고 있는데 개선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따져 물었다.
국민들의 시선도 곱지 못하다. 이공계를 떠나는 KAIST 학생들에게 준 장학금을 ‘세금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금으로 공부해놓고 다른 일 하겠다고 이공계를 떠나면 장학금을 뱉어내는 건 당연하지 않냐?’는 식의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공계를 떠난 이들의 속사정
KAIST 국정감사 때마다 국회의원들은 비이공계로 진출하는 졸업생들이 많다며 압박을 가하고, 뉴스를 보던 국민들은 세금으로 공부 시켰더니 돈 벌려고 의사 되겠다고 의전 간다며 혀를 끌끌 찼지만 이들은 단 한 번도 왜 20%의 졸업생들은 이공계를 떠나 의·치전원에 가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돈 많이 버는 직업을 택하기 위한 선택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그들이 비이공계로 전향한 이유의 전부였을까? 단순히 돈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이공계의 길을 떠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치전원에 진학하려는 또는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나는 KAIST에 입학할 때에도 별다른 꿈이나 포부는 없었다.”
“어떤 특별한 꿈을 갖고 KAIST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꿈과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인 중·고등학교 시절을 학업에 치여 살다가 성적에 맞춰서, 혹은 학과보다는 학교 이름에 맞춰서 대학에 진학한 경우는 대한민국 대학생들 대부분이 갖는 현실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 모습은 의·치전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막연히 이공계로 가겠다고 생각만 했지 구체적으로 이공계에 가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진로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하기보다는 일단은 수학, 과학을 잘 하니 이공계로 왔다는 것이다. 주변에서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에 앞서 일단은 공부부터 하라고 얘기했다. 나중에 꿈이 생겼을 때 공부 때문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지 어떠한 구체적인 목표와 확신을 갖고 공부를 했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학, 과학을 잘 해서 이과 공부를 열심히 했고 KAIST에 들어왔던 학생들은 정신없이 1,2년을 보내고 나니 졸업이 가까워지며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시작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단순히 지금까지 이과 공부를 해왔다는 이유로 이공계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엔 걸림돌이 많았다.
진로를 결정하면 이제 정말 그 일을 직업으로 삼고 평생 해야 하는데, 연구를 하고 싶은 지, 잘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비전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한데 무턱대고 갈 수도 없는 법이었다. 처음부터 꿈을 쫓아 온 길이 아닌데 뒤늦게 꿈을 찾으려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일의 종류, 강도, 급여, 사회적 지위, 앞으로의 전망 등을 고려했을 때 지금의 이 상황에서 갈 수 있는 길 중 가장 괜찮은 진로는 ‘의사’라는 생각들이 대부분이었다.
왜 일까?
“아무리 의사가 천차만별이라 해도 페이닥터가 굶어죽진 않는다.”, “의사는 눈이 멀어도 의사고 귀가 먹어도 의사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의사라는 직업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공부 잘 해서 KAIST도 나오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연구원이나 교수가 될 거란 보장도 없는 길.
비정규직으로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연구원 인생. 그 반면, 진학만 하면 ‘의사’가 보장되어 있는 의·치전원. 이 결과를 아는 이상 선택하는 것은 쉽거나 혹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선택을 함에 있어서 이공계 진로, 또는 연구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지 않은 이상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전원에 재학 중인 A군은 “의대, 의전원 등록금이 한 해 천만 원 가까이 되는데도 학생들이 몰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부모가 능력이 되고 집에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빚을 내서라도 일단은 학교를 다니면, 의사라는 직업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의사’의 경제력은 아무리 개인차가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보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며 “아무리 학교 다닐 때 장학금 많이 준다고 해도 졸업 후의 진로가 보장이 안 된다면 그 분야의 인력 확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의전원 진학을 준비 중인 B양은 “가끔은 의사가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사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의사라는 직업이 먹고 살려고 선택할 직업은 아니다. 최소한의 소명의식이나 책임감도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개인의 삶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진로로 의전을 고민하면서, 나 스스로가 그런 것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는 지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한 고민을 계속 했었다.
사실 의사는 큰돈을 벌기 위해 한다기보다는 안정적이니까 선택을 하는 것이다. 막상 생명과 대학원을 간다고 해보자. 7~8년 동안 박사 받을 때까지 한 달에 몇 십 만원 하는 쥐꼬리만 한 돈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가? 정말로 먹고살 수 있는 기본적인 수준의 직업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공계 직업은 그렇지 못하니까 의사를 선택하는 것이다.”며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도 채워주지 못하는 이공계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연구하는 것이 즐겁고, 연구가 하고 싶어서 마지막까지 의전과 대학원 사이에서 갈등했다던 C군은 “지금의 이공계 연구 환경은 연구하고 싶은 이들도 떠나게 만드는 환경이다.”며 비전이 없는 이공계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언제부턴가 과학계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가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 가’가 연구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분명 필요하고 해야 하는 연구인데 아무도 하지 않고 있다. 왜? 돈이 안 되니까. 연구비 지원을 받기가 어려우니까. 지도교수님을 만나서 나중에 어떤 연구를 하고 싶은 지 상담을 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런 연구는 할 수가 없다.’는 말씀만을 반복하셨다. 할 수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며, 연구실 생활을 더 하며 다른 주제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없다고 말해서 돌아선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할 때 이 길에는 더 이상 비전이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에서 이공계를 제대로 대우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KAIST에서 이공계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이공계 비전이 없는 것이다. 의전원 진학을 준비 중인 B양은 “대학원생들을 보면 안타깝다. 학생도 아니고 직업인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서 교수가 된다거나 연구가 대박난다는 보장도 없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정말 먹고살 만큼밖에 못 받는다.
솔직히 세포가 주말은 봐주면서 크는 것도 아니고, 대학원생들 보면 설도 없고 추석도 없고 휴일도 없이 일한다. 밤새가면서 연구하면서 ‘개고생’ 하는데 미래 보장은 안 되어있다.”며 이공계의 암울한 현실을 단적으로 꼬집어냈다. 또한 “솔직히 누가 봐도 현실적으로 제약이나 어려움이 많은데 누가 이 길을 선택하겠는가. 자유 시장 경쟁논리 그렇게 좋아하면서, 메리트도 없는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은 ‘너희가 희생해라’ 밖에 안 된다. 솔직히 KAIST가 다른 국공립대랑 비교해보면 나라 지원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다. 대학원생들 덕분에 굴러가는 학교이다.
그런데 정작 대학원생에 대한 대우는 어떤가.”라며 이공계에 대한 처우 개선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이러한 사태가 호전될 수 없음을 밝혔다. 올해 의전원 진학 예정인 D양은 “나에게 있어서는 일을 통해 성취감을 얻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만큼이나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여유 있게 사는 것도 중요하다. 육아라든가 경제적 여유, 여가 생활 등의 삶의 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생명과학 연구원은 의사보다 한참이나 뒤쳐진다.”며 “이러한 부분이 개선되어야 의전원으로 빠져나가는 이공계 학생들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장학금을 뱉어내라고?
한편 이공계 장학금 환수 정책은 또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다.
이러한 이공계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진로를 바꿀 수는 있지만, 그것과 이공계 장학금 환수는 별개라는 것이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이공계 진로를 이탈했으니 장학금으로 수여했던 금액을 환수해서 다른 이공계 분야에 지원을 하는 것이 이공계의 발전에 더욱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말이다.
KAIST는 일반 대학과는 다르다. 경찰대학이나 사관학교처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갖고 설립된 학교이다. 국가에서 경찰대학이나 사관학교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 주는 이유는 이들이 이 학교를 다니고 공부하면서 경찰이 되고 군인이 되라고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KAIST 학생들은 과학자가 되라고 돈을 지원해 주는 것이므로, 당연히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춰보면 이러한 이공계 장학금 환수 정책의 논리가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이공계와 비이공계, 경계조차 모호하다.
사실 KAIST 내부에는 이미 비이공계 진로가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바로 산업디자인학과, 경영과학과, 정책기술대학원, 금융공학부전공 등이다. 얼핏 보기에는 의·치전원보다 더 이공계와 관련이 없을뿐더러, ‘이공계 분야의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디자인/경영/정책/금융 분야에서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목적은 그 분야가 ‘의학/치의학’분야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의·치전원의 목적과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책기술대학원의 졸업생들은 중앙일보, KBS미디어, Mnet미디어, PCA생명보험같이 비이공계 진로처럼 보이는 다수의 회사에 취직하는 등 본인의 관심분야에 따라 다양한 곳으로 진출한다. 삼성전자나 LG전자의 경우에도 기획, 전략, 마케팅 등의 경영지원분야로 진출하기도 하고 DMC 부문처럼 미디어/콘텐츠와 관련된 부서 등으로 취업을 하기도 한다.
산업디자인학과 또한, 공식적으로 이공계열에 속해있지 않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비롯한 국내 타 대학의 산업디자인학과와 개설과목이나 졸업 후 진로 등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과학기술특성화 대학으로 이공계 분야의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 KAIST에서 공식적으로 이공계의 인재들이 비이공계 길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KAIST에 의·치전 대학원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많은 학생들이 진학하지는 않더라도, 현 의·치전원 제도와 같은 목적, 같은 진로를 가진 대학원이 KAIST내에 존재했더라면 지금처럼 많은 비판을 받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미 KAIST 내에는 공식적인 비이공계 진로가 충분히 존재한다. 이는 이공계분야의 학문이 그만큼 응용가능성이 다양하며, ‘이공계’와 ‘비이공계’ 진로가 칼로 무 자르듯 완벽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연구실에 앉아서 논문을 읽고 실험을 해야 이공계 진로이고 연구실 밖에서 수학·과학 이외의 분야에 종사한다고 해서 비이공계 진로인 것이 아니다. 결국 이공계 장학금 환수정책은 학문 간의 유기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공계와 비이공계를 가르는 일차원적인 생각이 만들어낸 오류에 불과하다.
또한 이공계 인력의 비이공계 분야 진출은 오히려 이공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장려해야 한다.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는 ‘정책입안자’를 생각해보자.
진정으로 이공계 학문 연구를 활성화하고 이공계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려면 이공계를 알아야 한다. 이공계 학문을 공부해보고, 연구를 경험해보고, 이공계 진로를 고민해보고, 이공계의 가능성과 미래를 보며 꿈에 부풀어보고, 그 어려운 현실 앞에서 좌절해본 사람이어야 진정으로 이공계를 위한 정책을 만들 수 있다.
KAIST 화학과 김우연 교수님 또한 인터뷰에서 “이공계 출신들이 사회의 다양한 방면으로 자리 잡는 것에 적극 찬성한다.”며 “선진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앞으로는 정계에까지 이공계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된다.
최근 3선 연임에 성공하면서 리더십을 인정받은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양자화학 박사 출신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학교는 도울 의무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학생들이 다 방면에서 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학교에도 득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훗날 KAIST 학부 출신으로 의·치전원에 진학한 학생이 의∙과학 분야에서 훌륭한 연구 업적을 달성하여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두 번째, ‘이공계 계약금’이 아니라 ‘이공계 장학금’이다.
경찰대학, 사관학교 같은 특수학교와 KAIST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KAIST 졸업장에는 과학자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경찰대나 사관학교는 졸업하면 경찰 또는 군인으로 직업이 확정되고 진출이 보장된다.
그러나 KAIST는 졸업 후에도 아무런 보장이 없다. 말 그대로 졸업하고 치킨집을 차려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졸업 후 국가에서 직업을 보장해주는 특수학교들과, 박사학위를 따고 졸업을 해도 국가연구소는 정규직 연구원조차 보장해줄 수 없는 KAIST를 같은 선상위에 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공계 장학금 환수 논리에는 이공계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당연히 이공계 진로로 진출해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학금의 본 의미를 잊은 논리이다. 장학금은 ‘학업 장려금’이지 ‘계약금’이 아니다. 이공계 분야의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 위해 주는 돈이지, 이공계 진로를 선택하는 조건으로 주는 계약금이 아니다. 즉, 꼭 이공계 진로를 택해야만 이공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KAIST 학사과정에서 제시하는 교과목 이수 요건에 맞게 학업에 임하여 직전 학기 취득 학점과 평점에 있어서 장학금 수혜 조건을 만족하였을 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물리학과 학생이 미적분학, 일반화학 등의 기초필수 과목과 고전역학, 양자역학 등의 전공필수 과목을 비롯하여 KAIST 물리학과에서 제시하는 ‘졸업 요건’에 해당하는 여러 과목들을 매 학기 12학점 이상씩 들으며 3.14 이상의 평점을 받았다면 이공계 장학금을 수여할 자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한 학생이라면 이공계 분야에서 학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이다. 국민들이 말하는 ‘세금 축내서 공부시키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꼭 교육을 받는 개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은 국가적 이익을 위한 사업이고, 그렇기에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교육에 많은 세금을 쓰는 것이다. 이 때, 국가는 진정으로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공계 진로에 대한 족쇄와 함께 장학금을 주는 것이 진정으로 쓸모 있는 이공계 인력을 양성하는 방법일까.
이공계전문교육기관에서 이공계분야의 인재들을 뽑아 돈을 지원해주며 특화된 교육을 시키는 것은 이공계 전문 인력의 양성을 위한 정책의 ‘일부’이다. 수학, 과학을 좋아하는 어린 꿈나무들이 전문적인 이공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이공계 대학생들이 이공계 진로로 완전히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어 주며, 이공계 진로에서 학문의 발전을 위하여 힘쓰는 연구자들을 지원해 주는 것이 국가적으로 훌륭한 이공계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정책이다.
이공계 분야로 진출하지 않는다고 이공계 장학금을 환수하겠다는 것은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공익광고를 만들어 조회 시간에 틀어주는 것을 의무화했다가, 학교폭력 문제 해결이 잘 안 되는 학교들은 광고를 틀지 말라고 말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단순히 공익광고만으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듯이, 이공계 장학금만으로 이공계 인재를 양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공계 장학금만으로 이공계 분야를 활성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연구 환경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함께 따라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은 이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 세계적 과학자로 성장할 잠재력을 가진 과학자를 발굴하기 위해 마련한 ‘젊은과학자상’의 격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젊은 과학자상은 만 40세 미만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한국과학상’과 함께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그러나 제정 당시 5년간 3000만원의 연구 장려금을 지급하고, 대통령이 직접 시상하던 것과는 다르게 지난해 젊은 과학자 상의 상금은 3000만원, 단 1회로 대폭 축소하였으며 시상자 또한 미래부 과학기술조정관으로 격하되었다. 제 1회 젊은 과학자 상 수상자인 KAIST 생명화학공학과 이상엽 교수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대통령이 직접 상을 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명심해야 할 것”이라며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공계 분야에 대한 진정한 투자 없이는 이공계 분야의 발전을 이룩해낼 수 없다. 이공계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의·치전원과 로스쿨에 간다고 하여 장학금을 환수하고, 예산이 부족하다고 우수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상금을 깎는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정책이 계속된다면 이공계의 미래는 밝아질 리가 없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이공계 분야에 대한 상을 늘리고 상금도 늘려야 이공계 우수 연구 인력이 확보되고 이공계 연구가 활성화되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이공계를 위한 진심어린 고민이 필요할 때
이공계 장학금 환수정책에는 이공계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얽히고설켜있다.
이공계 진로로 나아가는 갈림길에 선 학생들의 고민도 있고, 이공계 인력 확보에 차질을 빚고 있는 과학기술계의 고민도 있고, 침체되는 경제와 부족한 예산으로 골머리를 앓는 정부 관계자들의 고민도 있다. 하지만 이 정책은 그 어떠한 고민에도 해결책이 되어줄 수 없다.
이러한 고민들의 근본 원인은 ‘학비’가 아니라 이공계 연구에 대한 ‘부족한 투자’와 이공계 인력에 대한 ‘낮은 처우’에 있기 때문이다. 이공계 장학금 환수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모양에 불과할 뿐이다. 국가의 과학인재 육성 전략 실패에 대한 책임을 학생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며, 국가의 정책 입안자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제도인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이 걱정 된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석·박사 대신 의·치전원을 선택하는 것이 오늘날 이공계의 현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더 많은 이공계 인력이 ‘빠져나가는’것이다.
KAIST 출신들이 정책입안자가 되어서 진정으로 이공계 인력을 양성하고 과학 기술인을 위한 정책을 제정하고, 기자가 되어 이러한 현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국민들의 인식을 개선하며, 이공계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이공계 지식을 활용한 창의적이고 다양한 발전을 창출해내어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진정으로 이공계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이공계의 발전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진심어린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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