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혼돈 앞에서 무력하다. 그리고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 차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는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여준다. 누구도 그를 피해갈 수 없으며, 언제 오는지 또한 예측할 수 없다.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다. 가난한 퇴역군인이 어쩌다 돈 가방을 줍고, 갱단과 킬러가 그를 쫒는다. 눈여겨 볼 인물은 도망자 르웰린 모스, 킬러 안톤 쉬거, 보안관 에드 톰 벨이다. 감독은 세 명의 시선을 번갈아 사용하며 사건을 관찰한다.
세 명의 주인공은 서로 만나지 못한다. 매 장면에서 관객은 한 명의 주인공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르웰린 모스를 비출 때, 아무리 발악해도 쉬거를 막을 수 없는 비참함을 느낀다. 에드를 비출 때, 혼돈으로 찬 쉬거를 따라가지 못하는 무력감을 느낀다.
안톤 쉬거는 관객마저도 따돌리고 압박한다.
‘안톤 쉬거’라는 혼돈에 두 인물은 다르게 대응한다. 르웰린 모스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추적할지 예측한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조심하고 철저히 준비한다. 그러나 그를 잠깐 따돌릴 수 있을지 몰라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르웰린은 자신만만해 하지만 에드는 인간과 소의 싸움도 결과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쉬거의 거래를 거절한 르웰린은 결국 쉬거가 아내를 죽이게 만든다. 그 또한 목적을 잊고 긴장을 풀자 갱단에 의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원인은 얼마든지 널려있었다. 그가 죽은 원인은 만나지도 못한 장모가 갱단에게 속아 위치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에드 톰 벨은 노련한 보안관이다. 르웰린의 트럭을 알아채고 우유병에 맺힌 물방울을 통해 쉬거가 금방 다녀갔음을 추리한다. 후배 경관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는 쉬거와 똑같이 소파에 앉아 우유를 마시며 꺼진 텔레비전을 본다. 그러나 쉬거와 달리 에드의 시야는 텔레비전 속에 갇혀있다. 아무리 지혜롭더라도 혼돈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르웰린에 집에 간 에드는 고장난 문고리를 본다. 소파에 떨어져있는 잠금장치를 찾아내지만 범인이 어떻게 문을 땄는지는 알아채지 못한다. 시체에 총알이 없다는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는 쉬거가 다녀간 현장을 살피는 데에 그친다. 또한 에드는 사건과 거리를 유지한다. 외부와 엮이길 싫어하는 그는 추가 정보나 현장에 가는 것을 거부하고 본인의 판단력에 의지한다. 르웰린보다도 소극적인 그가 안톤 쉬거를 잡기란 불가능하다.
엘 페소에 간 에드는 보안관과 대화한다. 갱단이 돈을 모두 챙기고 도망갔다고 한다. 보안관은 20년 전엔 상상이나 했겠냐며 한탄한다. 범죄현장을 유유히 거닐며 퇴역한 육군 군인을 쏜 안톤 쉬거에게 혀를 내두른다. 사건은 종결됐지만 에드의 표정은 심란하다.
르웰린이 죽은 모텔 방을 찾아갔을 때, 문고리는 똑같이 박살나있다. 르웰린은 맥시코 갱단에게 죽었으므로 쉬거가 모텔에 왔음을 알아챈다. 긴장한 그가 총을 꺼내고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그의 그림자이다. 쉬거는 그곳에 없었고 바닥에는 나사와 동전이 흩어져 있다. 환풍구에는 돈가방을 꺼낸 흔적이 남아있다. 직전 보안관은 갱단이 돈을 챙겼다고 했지만 사실과 달랐다. 그들은 진실을 모른다.
떨어진 동전은 에드에게 힌트가 되지 못한다. 동전의 앞면은 에드를 비웃는다.
그의 직감만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 그는 삼촌의 집으로 간다. 삼촌은 에드보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그를 놀린다. 삼촌은 에드보다 지혜롭지만 무너지기 직전의 집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다. 그 또한 에드만큼이나 무기력하다. 에드는 세상이 험악해졌다며 은퇴를 말한다.
그러나 과거 또한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삼촌은 에드에게 가족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보안관임에도 총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현관 앞에서 강도의 총에 맞아 죽었다. 안톤 쉬거와 같은 혼돈은 언제나 존재했다. 다만 에드가 그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을 뿐이다.
늙음은 지혜로움을 터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무력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르웰린과 에드의 판단력은 비슷하다. 단지 르웰린은 끝까지 버티려다 죽었고 에드는 배지를 내려놓았다는 차이밖에 없다. 삼촌은 벨이 겪은 일이 새로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세상은 녹록치 않고 벨이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안톤 쉬거라는 혼돈 앞에서 우연과 필연을 따지기란 무의미하다. 22년을 여행한 동전의 자취는 필연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22년의 여행은 수많은 동전들 사이에서 우연히 사용되어 성립했다.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르웰린 모스가 일련의 사건들을 인과적으로 거쳤지만 그의 끝은 결국 우연이었다. 돈가방을 주웠다는 원인을 살펴보면 필연적인 죽음으로 보이기도 한다.
세상은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어느새 돌변해있다. 인간은 변화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늘어갈수록 변화는 날카롭게 느껴진다. 원래부터 날카로웠던 세상을 알아가지만 너무나도 날카롭기에 잡을 수 없다.
살기 좋은 곳은 애초에 없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닫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드는 꿈 이야기를 한다. 첫 번째 꿈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을 잃어버리는 꿈이다. 기억 속 젊은 아버지는 에드에게 돈을 준다. 그러나 에드는 돈을 잃어버린다. 르웰린을 포함해 돈으로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보았음에도 에드는 돈을 버리지 않고 잃어버린다.
두 번째 꿈 속 그의 아버지는 춥고 어두운 밤에 말을 타고 달린다. 혼돈의 세상은 담요를 뒤집어 써야 할 정도로 차갑다. 그래도 그는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나중에 올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두른다.
에드는 아버지를 따라 보안관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횃불을 들지는 못했다. 보안관 일을 하다 단명한 아버지와 달리 에드는 혼돈의 살인마와 맞서 싸우지 못한다. 간발의 차로 르웰린을 살리지 못했고 칼리마저 안톤 쉬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쉬거를 잡을 수 없다. 혼돈을 피하고 은퇴를 결정한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다. 그리고 그는 남은 평생을 회한에 찬 채로 보낼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글 김기범
편집 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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