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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라는 전기비평(傳記批評)의 신봉자: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버드맨』 Take 2

문화예술

by 미아스마 2019. 10. 1.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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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

 

모든 사람이 드럼만 보는 연주는 성공할 수 없다


재즈풍의 드럼연주는 또 무엇을 나타내는가? 드럼은 주인공을 함축시킨 발걸음이다. 또 원 테이크라는 거대한 기둥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준 이음새이다. 재밌는 건 음악가에게도 있다. 곡을 연주하고 만든 사람은 안토니오 산체스 재즈 음악계에서는 나름 실력 있는 음악가였지만, 영화에서는 신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신인과 버드맨의 만남은 감독의 독특한 의식을 맛볼 수 있다. 이런 세부적인 내용은 중요하지만, 지금은 재즈 드럼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우선 드럼이라는 것이 홀로 연주될 수도 있지만, 합주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악기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드럼 혼자 바쁘게 연주된다. 불협화음도 있고, 주인공의 심장과 동기화되기도 한다. 드럼이 단독성을 지닌다는 것. 이는 리건 톰슨의 삶과 오묘하게 연결된다. 버드맨이라는 과거에 짓눌려 모두가 합주해야 하는 연극에서도 사람들은 리건 톰슨을 바라본다. ‘옛날 영웅이 어디 한 번 어떻게 연기하는지 보자 팔짱을 끼고 본다. 

하지만 드럼은 혼자 있을 때 그렇게 돋보이지 않는다. 음악의 흐름에 조용히 박자, 리듬을 부여하는 것이 재즈 드럼이다.

사람들은 그걸 듣지 않고, 모두 드럼의 얼굴만 본다. 리건 톰슨은 원만한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자꾸 자신만 보니까 획기적인 연주를 하고, 과거에 들어맞는 리듬을 연주해야 했다. 그래서 불협화음도 넣고 실험적인 연주(팬티만 입고, 스틱 없이)도 했다. 때로는 드럼 대신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눠 연주하기도 했다. 물론 그 끝은 드럼도 리건 톰슨도 없는 자기 파괴였다.

 

자신을 쏜 한 발


버드맨


실제로 그가 연극인이었으면 가장 실험적인 작품의 주인공이다
. 그는 왜 자신을 쏘았을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자신을 쏜 것이 아니다. 그는 과거를 쏜 것이다. 더불어 자신을 방해하고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 빌어먹은 비평가에게도 씨발 니들이 좋아하는 아트다’ ‘익스퍼리멘털이다하고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는 한 번에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토록 죽이고 싶은 버드맨은 죽지 않았다. 그에게 선택이 여지는 없다. 다시 과거를 죽이는 것이다. 과거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뿐이니까. 대중들이 그렇게 혐오하고, 찾는 과거를 죽이지 않고서는 비상할 수 없으니까. 그는 비상을 위한 추락을 선택한다. 떨어짐으로써 비로소 그는 자유가 되고 과거에서 해방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또 영화감독이 누구고 무엇을 만들었는지 찾아보고 있다. 배우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마이클 키튼이고 베트맨이란 영화에 참여했는지를 점검해본다. 그리고 그 연관성을 또 잇고 있다. 전기비평의 신봉자는 정보가 보편화하면서 늘어나고 있다. 그게 누군가를 과거에 가두고 옭아매게 만드는지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영화 제목도 그런 의도이다. 버드맨에서 떠나고 싶은 주인공에게 버드맨이라는 타이틀이라니.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의도를 담아냈다.

그렇다. 리건 톰슨은 스스로 죽었지만, 불특정 다수에 의한 타살이다. 

물론 가해자는 이 영화를 아직도 버드맨이라고 부르고 있는 당신도 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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